캐서린칼럼



게시물 검색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 감사합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 한국NVC센터
    • 2023-12-07
    
     

    감사 그리고 환영

     

    한국비폭력대화교육원 대표로 지난 3년간 기여해 주신 박기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교육원이 어려운 코로나시기를 안전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박기원님의 안전에 대한 큰 주의와 돌봄의 결과입니다. 이제 신임 공동 대표가 활동 할 수 있는 기반을 지어 주셨습니다. 앞으로 계속 여러 과정의 교육을 하시면서 교육원의 성장을 지원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한국비폭력대화교육원의 신임 공동 대표, 정지선씨와 윤인숙씨를 환영합니다.

    정지선씨는 취임사에서 앞으로 즐겁게 출 자신의 춤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윤인숙씨가 앞으로 홍보 계획을 나누어 주셨을 때 우리 모두의 가슴에 설렘을 느꼈습니다.

     

    저는 앞으로 두 분이 자신의 즐거운 속도로 펼치실 활동을 함께 보면서 같이 축하하고, 고민하고, 옆에 있어 드릴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때 “기대합니다.”. “기대됩니다.”, “기대가 커요.”라는 말로 즐거운 마음을 표현 했습니다. 그러나 비폭력대화를 배우고 나서는 ‘기대’(expectation)라는 것은 나의 생각, 나의 예상으로 상대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와 함께 새 팀, 윤인숙씨, 정지선씨 반갑게 맞이 합니다.

    환영합니다.

     

    캐서린 드림

     

     

     

    출처: https://giraffeground.tistory.com/1526 [기린마을 이야기:티스토리]
    게시글 공유
  •  

     

    워크숍을 시작할 때 자주 긴장이 되곤 했습니다.

    오랫동안 하다 보니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것을 실천하게 되어 나누어 드립니다.

     

    관찰(Observation), 느낌(Feeling), 욕구(Need), 부탁(Request)에 기반한 것으로 자신이 현존하고, 그 현존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OFNR(관찰, 느낌, 욕구, 부탁)의 구성 성분은 언어 외에도 어떤 의식인데 그 의식으로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수업을 시작할 때 가볍고, 상쾌했습니다. 원하는 만큼 수업 준비를 못 했을 때도 긴장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수업 준비를 하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소통을 다룰 때는 보통 말로 하지만 동시에 소리, 그림, 이미지, 몸짓(body language)으로 많은 소통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말의 소리를 듣고, 모든 사람의 이미지를 보고, 몸동작을 의식하면서 전체 그림을 의식으로 봅니다. 긴장된 내가 있고 참가자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그림의 한 부분으로 그들과 하나임을 마음의 눈으로 봅니다. 그냥 소리, 모양, 움직임을 의식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 의식은 나의 의식, 저 사람 의식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두의 의식이라는 것이 금방 느껴집니다. 들리는 것의 뜻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소리로 듣고, 보이는 이미지의 경험도 명상으로 가져갑니다. 그 명상의 존재로 있을 때 조화로운 관찰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다음에 몸의 느낌을 존중하기 위해서 주의를 몸 안으로 들여옵니다. 몸에 느낌말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느끼는 감각과 감정이 의식 안에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몸 안에 있는 섬세한 생동감 에너지에 닿습니다. 그 에너지는 점점 선명하고 강해지면서 몸 안에서 돌다가 우리 몸의 한계를 넘어 퍼져 나갑니다.

     

    즐거운 순간은, ‘내 몸을 통해 흐르는 이 에너지, 그리고 존재로 관찰하는 이 의식’을 동시에 알아차릴 때 몸과 마음에 중심이 잡히고, 안정되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이 에너지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우주적(universal)으로 되는 것이 욕구의 한 선물입니다. 신성한 사랑의 에너지 (Beloved Divine Energy)라고 마셜이 부른 이 에너지는 모든 것,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을 통해서 흐릅니다. 같은 삶의 에너지와 같은 의식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상상할 때 즐겁습니다. 그 에너지를 소통하며 나누려 할 때 쓰는 말, 단어들이 있지요. 이런 의식 차원에서 욕구 단어를 함께 쓰면서, ‘나의 욕구’, ‘당신의 욕구’를 세상이 다 함께 나누는 ‘우리의 욕구’로 연결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성한 욕구의 에너지를 나누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것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같은 의식으로 같은 말을 쓰면서 서로 주고받는 즐거움이 우리를 연결해 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연결이 되면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연민으로 서로 주고받게 된다고 마셜은 말했습니다. 그런 욕구 차원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이 누구이든지 모두에게 친절 할 수 있는 잠재력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정리해 보면,

    수업을 시작하려 할 때:

    (1) class 전체를 나를 포함한 한 그림으로 보고,

    (2) 몸 안으로 주의를 돌려 몸의 느낌이 의식으로 떠오르게 하고, 생동감 에너지를 감지한다.

    (3) 내면에 평화와 안전의 에너지가 온몸에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 에너지가 우리 몸의 한계를 넘어 밖으로 흘러나간다. 아직 밖으로 아무 말을 하지는 않으나 우리 에너지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편안한 연결이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자 이제 워크숍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캐서린 드림

     

     

    게시글 공유
  • 관찰의 예술 Art of observation

    • 한국NVC센터
    • 2023-07-06

    관찰의 예술

     

    Art of observation

     

    비폭력대화(NVC)를 배우고 난 후에 자극을 받아서 짜증이나, 화가 났거나 즐거운 일이 있어 같이 축하하고 감사하고 싶을 때 4 스텝 - 관찰, 느낌 욕구, 부탁 - 으로 자기표현을 하고 들어주면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 삶이 풍성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우리 일상생활에 그런 자극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나머지 아무 일도 없는 시간에 ‘관찰’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마셜이 관찰 부분을 연구할 때 영향을 많이 받은 크리슈나무르티는,

    “일상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의 예술(Art of Observation)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크리슈나무르티는 간단히 “K”로 표시.)

     

    “K”가 말하는 관찰은 우리가 관찰할 때 아무것도 그 관찰을 방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없을 때를 말한다. 아무런 동기나 목적이 없이 그냥 지금 그대로를 듣고 보는 것이다.

    왜곡이 없으면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신비함이 보인다.

     

    방해하는 것이 없을 때 우리는 자유롭고 편안하게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을 관찰하게 된다. 우리가 코어자칼 프로세스를 할 때 가끔 경험하듯이 숨겨진 것이 없이 의식이 그 안에 내용물을 우리에게 들어내 보여 준다.

     

    우리 의식 안에 있는 내용물은 전에 우리가 받은 상처, 우리의 탐욕, 우리의 시기, 우리의 즐거움,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의 관념, 희망, 두려움 – 이 모든 것들과 과거의 관습, 전통들, 그리고 현재의 과학적이거나 사실에 입각한 것들 등 등 등 모든 것이 우리 의식의 내용물이다.

     

    이 모든 내용물은 생각이 우리 의식 안에 넣은 것이다.

     

    그러면 생각은 어떻게 우리의 관찰을 왜곡하여 문제를 일으키나?

    생각이 하는 일은 우선 평가다. 그리고 선입관, 그리고 내가 옳다고 장담을 하는 내 신념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생각이 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의견은 그 순간에 삶, 현실(Reality)을 보는 한 시각, 한 전망 perspective일 뿐이다. 그러니 생각은 이것이 현실이고 진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내 생각들이 내 의식을 지어 놓았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로 자극을 받았을 때 우리 의식은 생각이 그 안에 넣어 놓은 내용물에 기반을 두어 반응한다. 그때도 생각이 또 나타나서 “이것은 옳아, 이건 틀렸어. 이랬어야지, 안 그랬어야지” 한다. 그런 생각에 휘둘릴 때는 우리는 아직도 생각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생각을 넘지 못한 것이다.

     

    “K”는 우리가 특히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신성한 것을 찾으려 할 때 들어오는 생각은 오염물질로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관찰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K”가 관찰의 예술이라고 할 때 그 예술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K”가 쓰는 영어 Art의 원래 뜻에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아 조화롭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K”가 의미하는 예술적인 관찰을 이해하려면 우선 생각을 적절한 장소에 놓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삶에서, 일상생활에서 생각이 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NVC 홈페이지에 들어와 이것을 보는데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전기, 컴퓨터, 인터넷, 등을 생각이 만들었고. 그리고 직장에서 집에 올 때도 생각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의료 기구, 약들도 만들었고, 아름다운 건물들, 다리도 짓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많은 것을 만들 때 우리는 생각을 쓴다. 동시에 원자 폭탄과 크루즈 미사일을 만드는데도 우리는 생각을 쓴다. 그러나 생각은 우리가 아는 지식, 개인적인 경험으로 조건화되어 있어서 항상 한계가 있다. 그래서 생각은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할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의 한계를 분명히 이해할 때 우리는 생각에 적절한 자리를 주어 그곳에서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은 그만의 장소가 있다.

    기술적이고 지식 영역에 그만의 장에서 많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심리적인 면에는 생각이 들어 올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한계가 있는 생각이 우리 인간관계나, 사랑, 신성한 에너지에 들어오면 오염의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오염의 요소로 생각이 인간관계에 들어와 판단하고 비난, 강요, 경쟁을 하면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서로에게 꼬리표를 달고 서로를 반박하는 혼란과 갈등의 모순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심리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질투, 복수를 하고 싶고, 외롭고 절망스럽다.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많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서 불행하다.

     

    마셜은 이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 “NVC에서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관찰, 느낌, 욕구, 부탁만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생각은 과거다.

    과거의 생각이 뭉친 것이 ego이다. 생각을 내려놓고 관찰을 할 때는, 다른 말로 ego를 내려놓고, 즉 생각(과거)으로 관찰하는 존재 없이 그냥 관찰만, 보는 것만 있게 된다. 생각이 만들어 놓은 것을 넘어서 그것들을, 의식을 비울 수가 있게 된다. 그러면 우주의 에너지가 우리를 통해 흐른다. 우리가 그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멈추게 되니까.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현실이다.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무나 집을 볼 때,

    누가 보고 있나요?

    어떻게 보고 있나요?

     

    나무나 집을 볼 때 우리가 보고 듣는 움직임은 우리가 쓰는 말, 단어로 방해를 받고 그 나무나 집의 진실과 우리는 차단이 된다. 그 말이나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생각)의 힘이 그 나무나 집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관찰을 왜곡시킨다. 그리고 생각은, ‘이것은 좋은 나무고, 저 집은 이래서 좋고 저래서 나쁘고, 이랬어야지, 저러면 안 되지.’등 말로 분석과 비난으로 끼어든다. 우리의 뇌(머리)는 ‘말’과 기억으로 그물처럼 엮어져 있는 network다. 그래서 머리로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말로 하는 생각에 묶여 느낌과 욕구로 하는 공감으로 연결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 앞에 자신을 러시아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순간 나는 (실지로 나의 뇌, 머리, ego)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하면 내가 러시아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선입관, 지식, 근자에 새로 생긴 반감이 나와 그 사람 사이에 들어오다.

    그 순간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관찰자는 내 머리 안에 있는 과거의 지식이다. 그 지식이 터무니없는 바보 같은 허위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 그 지식이 우리의 관찰을 막고 차단을 하고 있다. 그 순간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아름다운 본성을 볼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결을 방해하는 생각들이 매일(거의 항상)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의식도 못 하면서 그냥그냥 지내기 때문이다. 우선 매일 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어 보자.

     

    매일 보는 남편을, 아내를, 어떻게 보시나요?

    지난 몇천 날의 기억으로 보시나요?

    아니면 매일 새롭게?

     

    지금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보고 있나요, 아니면 과거 기억 안의 다른 사람과 말을 하고 싸우고 있나요?

    우리 아이들, 남편, 아내는 살아 생동하는 존재(living thing)로 항상 변하고 있다. 내가 아는 내 남편은, 내 아내는 내가 마지막 본 어제의 그 사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이미 어제의 사람이 아니다. 그사이에 어떤 새로운 것을 보았을 수도 있고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하는 다른 새로운 사람이다. 그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관계, 사랑이 가능해진다. 항상 과거이고 선입관인 생각은 그 새로운 사람이 관찰되지 않는다.

     

    살아 생동하는 존재인 우리는 생각에서 자유로운 장에서 서로를 관찰하고 지금의 느낌과 욕구와 연결하고 현재형으로 부탁을 한다. 아니면 과거로부터 쌓아진 경험과 기억으로 서로를 보면서 ‘나는 저 사람 알아’라고 하면서 매일 아무런 호기심 없이 서로를 대하면 관계는 생동감이 없어져 같이 할 이야깃거리도 없어진다.

     

    그래서 아내, 남편, 아이를, 연인을 사회의 조건화나 이전의 기억에서 자유로운 눈으로 서로 볼 수 있을까요? 오래된 관계에서는 어려울 수 있다.

     

    연습이 필요하다.

    나무를 볼 때 ‘나무’라는 말, 레벨 없이 그 존재 자체와 아주 조용히, 천천히 연결해본다.

    꽃을 볼 때 아무런 레벨도 달지 않으면서 살아 있는 존재 그 생명 자체와 연결을 경험해본다.

    이런 관찰은 생각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의 눈과 귀가 따뜻한 관심과 애정으로 하는 것이라 비난이 들어오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보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인 칸막이, 두 사람 사이에 알게 모르게 쌓아진 벽을 부수어 없애 주어서 순수한 연결, 생동감, 사랑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의 움직임 없이 관찰하는 것이 “K”가 말하는 관찰의 예술인 것 같다.

     

    이렇게 생각(머리)을 끼워 주지 않으면서 관찰을 할 때는, 우리의 작은 ego에서 오는 주관적인 반응이 없어서 우리 앞에 펼쳐지는 우주와 편하게 함께 흐를 수 있게 된다. 그 주관적 반응은 대개 이건 좋아, 저것은 싫어하는 과거의 경험에서 오는 개인적인 선호인데 순수한 관찰에서는 이런 반응(생각)을 내려놓는(surrender)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 우주가 우리 앞에 펼지는 상황이 너무 힘들어 surrender는 커녕 받아들이기도 힘들 때가 있다. 그런 때 그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 싸워도 대개 우리가 진다, 그러니 그 상황을 내가 영적으로 성숙하는 기회로 받아 보는 것이다.

     

    비교적 쉬운 것은 날씨로 Surrender 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가 하늘에 주먹을 휘두르며 심하게 날씨를 저주할 때가 있다. 우리가 불평한다고 날씨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내 기분만 지독히 나빠진다. 하루 종일. 그 대신 그 날씨를 영적인 수련으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불평하는 생각의 움직임을 내려놓고 관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불평으로 보내던 시간과 에너지로 그 순간에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작은 긍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무척 좋아지는 변화를 체험을 할 수 있다.

     

    아내나 남편을 새로운 눈으로 보세요. 특히 아이는 아침에 보았던 아이가 아닙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배워서 다른 아이입니다. 부모에게서 이런 따뜻한 관심과 애정의 주의를 받을 때 아이들은 행복하여 이 세상에 그들만이 가지고 온 선물을 숨기지 않고 두려움 없이 펼치며 자랄 것입니다.

     

    생각은 우리 매일 생활에 필요한 기술적인 것을 많이 만드는 기여를 하는 장소가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류가 한 것처럼 생각이 심리적인 면에 넘어오는 것을 허락하면 생각은 많은 ‘적의 이미지’를 만든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사랑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전쟁을 하기 위한 무기를 만드는 것을 정당화한다. NVC에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전쟁에서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터에 가지 않도록. 그것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가할 때도 생각을 내로 놓고 예술로 관찰을 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K"가 주시는 팁 하나.

    생각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우리 안의 의식을 관찰할 때(명상)는 눈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동자의 움직임이 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눈동자를 아주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뇌가 조용해져서 관찰이 명료해진다.

     

    마셜에게 감사한다.

     

    캐서린 한

     

     

     

     

     

     

    게시글 공유